일부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 시장에서, 제가 근무했던 D사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인력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인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했고, 그럴 때 들었던 생각을 차마 직접 얘기하지는 못하고 맘속에 담아뒀다가 이제야 풀어 보았습니다.
개발자 인력 시장에서 선호하는 직장에서 오래 일했기에, 종종 “좋은 개발자를 추천해달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실대로 말했지요.
“제가 내성적이라 인맥이 좁아서 아는 개발자도 별로 없구요, 그 아는 개발자들도 지금 각자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서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려도, 상대의 눈빛에는 못내 아쉬움이 묻어납니다. 어떤 분은 저한테 혹시 함께 일할 생각이 없는지를 떠보기 위해 이런 간접적인 질문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남자 어린이들이, 자기 여자친구가 됐으면 좋겠는 여자애에게 “야 주변에 괜찮은 쏠로 없냐?”라고 묻는 것과 비슷한 심리인가 봅니다. 아니면, 남자친구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너 소개팅 나가 볼래?”라고 묻는 심리와 비슷한 걸 지도 모르겠구요. 물론, 그냥 순수히(?) 주변 사람의 소개를 요청하는 경우가 더 많겠습니다.
좋은 시니어 개발자는 누구인가?
소개를 원하는 “좋은 개발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앞서 무리하게 비유한 연애시장의 메타포를 조금 더 이어가자면, “괜찮은 남자/여자”처럼 불분명한 표현일 것입니다. 주위에 좋은 남자를 소개해달라며 이렇게 얘기하는 여자 친구, 한두 명쯤은 있었죠?
“키는 180cm+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힐 신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을 정도는 돼야겠지? 학교는 인서울이면 되고, 집안에 돈도 좀 있으면 좋겠고, 얼굴은 아주 잘 생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기 창피하지는 않았으면 해. 내가 정우성, 소지섭 뭐 이런 급을 바라는 건 아니고, 아! 요새 유아인 좀 괜찮더라 … 구구절절절”
차라리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아, 그렇구나, 그냥 넌 혼자 지내는 게 이 지구의 공익에 나을 것 같다. 우주에 가서 네 꿈을 찾아보렴!”라고 얘기해주면 되니까요. 하지만 저렇게 얘기하는 친구가 속물처럼 보일지라도 차라리 양반입니다. 그냥 뭉텅그려 얘기하는 친구에게, 아까운 내 동성 친구들을 소개해줘 봤자, 이번에는 뭐 키가 작네, 다음에는 성격이 별로네, 그다음에는 다 좋은데 얼굴이 너무 미안하게 생겼네, 이런 핑계들을 대고는 하지 않던가요?
아, 혹시 위에 적은 내용이 성차별적인 비유일까 봐, 공평하게 남자 버전도 적어볼까요?
“뭐, 좀 예쁘면 되지 뭐, 얼굴을 아주 깎아내린 미모는 아니더라도 길 가던 사람들이 한 번쯤 뒤돌아볼 정도면 되고, 쾌활하면서 얌전하고, 청순하면서 섹시하고, 몸매는 약간 마른듯하면서 글래머면 좋겠고… 아, 참, 나이는 나보다 4~5살 어리면 좋겠는데, 그보다 더 어려도 상관은 없어.”
물론, 남자들은 이렇게까지 얘기도 못 합니다. 저 내용의 일부도 체 말하기 전에 한 바가지 욕을 먹으며 두들겨 맞고 상황 종료될 테니까요. 그리고 대개는 자신이 어떤 여자를 원하는지도 저렇게까지 자세히(?) 알지도 못해요. 그저 이렇게 물어보는 정도지요.
예쁘냐?
암튼, 다시 원래의 좋은 시니어 개발자 얘기로 돌아와서, 아마 그분들이 찾고 있는 좋은 시니어 개발자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번듯한 IT기업에서 나름 인정받을 만큼 실력을 보유한, 검증된 개발자.
- 대기업의 프로세스를 체화하고 있어서, 스타트업에서도 바로 적용해 줄 수 있는 자.
- 10년 정도의 숙련된 경험으로, 갑자기 문제가 생겨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빠르고 안정적으로 개발하는 사람.
- 오랜 경력에 걸맞게 대인관계나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난 사람.
- 경력이 있으니 깊이 있는 기술이 있을 테고, 또 스타트업에서 일해야 하는 만큼 다양한 기술 스펙트럼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 소위 풀스택 개발자인데, 각 분야도 부족하지 않은 깊이가 있는 사람.
- 우리의 멋진 비전과 일치해서, 급여가 적더라도 미래의 폭발적 가능성을 보고 동기부여가 충만할 사람.
리스트 면면을 보면, 뭐 응당 그런 사람을 원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앞서 비유한 연애 시장에서의 기대치와 마찬가지이거나, 심지어 더 무리하게 느껴지더군요.
저런 개발자가 그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원할지는 둘째 치더라도,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저 정도 근처에라도 있는 개발자는, 연애시장으로 치자면 엄친아/엄친딸입니다. 20대 초절정 미녀인데, 성격까지 좋으면서 학벌도 끝내주는 뭐 그런 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자, 그럼 상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래 좋아, 그런 20대 연예인급 미녀를, 어렵사리 30대 후반의 별 볼 일 없는 너한테 소개해줬다고 치자.”
“근데 말야, 그런 여자가 널 왜 만나야 하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이런 질문과 답하기도 전에 알 수 있는 결론적 사실을, 왜 “개발자 구인”이라는 도메인으로 옮기면 새까맣게 잊게 되는 걸까요?
시니어 개발자가 기대를 충족할 부분
스타트업이 아니라 나름 안착한 IT기업에 다니는 시니어 개발자들이, 사실 어느 정도 좋은 속성들은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오랜 경력으로 문제 상황에 침착하게 대처한다.” 이런 자질은 어느 정도 기대를 걸어볼 만합니다. 장애 대응 능력 같은 것은 어디에서 책이나 구전으로 배울 수 없고, 실제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는 부분이 크기에, 그런 면에서 경력자를 우대하는 것은 인정할 만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신입도, 프로덕션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즉각 해결해야 하는 긴장된 상황 같은 영역에서는, 메꿀 수 없는 넘사벽의 틈새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원만한 대인관계나 커뮤니케이션도, 뛰어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같이 일하기 어려울 만큼 문제 되는 사람은 거르기 쉽습니다. 이건 큰 기업에는 그런 문제 구성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선별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한두 사람 건너건너 물어보면 분명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고, 레퍼런스 체크를 해보면 되니까요.
“거기 다니는 OOO 있잖아? 그 사람 어때? 일 잘해? 성격이 유난히 모나거나 문제 되진 않지?”
직원 수가 많아서 직접은 잘 모른다 하더라도, 특별히 뛰어나거나 특별히 문제 되는 사람들은 소문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드러날 만큼 대인관계에 문제 되는 사람은 쉽게 걸러 낼 수 있으므로, “오랜 경력에 걸맞게 대인관계나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난 사람.” 이 항목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깊이가 있는 개발 실력”도 그럭저럭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뭐 10년 경력이라고 해서, 다 같은 10년 경력이 아니고, 1년짜리 경력을 10번 쌓은 사람들도 많으니까 경력 다 믿지 말라고도 말하지만, 그래도, 앞에서 언급한 “인정받는 개발자”로 필터링을 마쳤다면, 어느 정도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
시니어 개발자가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
이제 환상을 깨봅시다. 그러나 문제는, 깊이 있는 개발능력이라는 게 “개발의 넓은 스펙트럼”과는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섹시하면서 청순한 거예요. 아무래도 경력이라는 것이, 자기 잘하는 도메인으로 파고드는 쪽으로 수렴하기 쉽고, 또, 대기업의 구조상 업무의 분업이 잘 되어 있어서, 그 분업 된 업무의 자기 파트를 전문적으로 잘하는 것이지, 전반적인 일을 뛰어나게 하는 것과는 별개이기 쉽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그런 분업화가 잘 안 된 환경에서는 제 역량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힘들어할 수도 있지요.
업무 프로세스나 시스템 역시, 그 시스템을 잘 따르는 경험과 그 시스템을 만들거나 장려하는 입장의 차이는 큽니다. 마치 (저 같은) 콩글리시 코리안들이 영어를 얼추 듣거나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꿀벙어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최, 왜 쪼끄만 몇 명 없는 스타트업에서 대기업 프로세스를 따르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프로세스로 파생되는 단점도 있고, 또 규모에 따라 유효한 프로세스가 다를 텐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어쩌면, 그 시니어 개발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 텐데, 보상과 급여의 문제입니다. 그 대기업에서 개발 능력을 인정받으며 다니고 있는 그 20대 초절정 미녀 같은 개발자에게, 그 회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능력자에게 연봉 적게 주고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평균 연봉도 높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인데, 그 와중에도 탑클래스의 급여나 인센티브를 받고 있을 사람이라는 거지요.
우선, 무리해서 그 연봉 수준을 맞춰주거나, 운 좋게도 심지어 더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오랜 기간 대기업에 근무한 사람의 속성상, 더 안정적인 회사를 선호하기 쉽습니다. 이미 도전이나 모험을 택할 사람이라면, 진즉에 이미 모험하고 있지 않겠어요?
만약, 금수저 들고 시작하는 투자자 빵빵한 스타트업이라서, 그런 연봉 처우나 지분이나 스톡을 두둑하게 주면서 데리고 왔다고 칩시다. 이건, 20대 초절정 미녀를 어떻게든 만났는데, 몇 번의 만남 동안 허세 가득 풍기고 우아하고 고상한 능력자인 척하며 무리해서 간신히 사귀기로 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얼마나 갈 수 있나요? 그렇게 큰 금액을 월급으로 줘야 하는데, 그렇게 줄줄 불타오르며 흘러나가는 자본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지분이나 스톡으로 데려왔더라도, 행여 그 사실을 다른 적은 지분이나 스톡의 멤버가 알기라도 하면, 불 보듯 뻔한 그 불화를 어떻게 감당할 건가요?
게다가, 분명 그 인정받던 시니어 개발자도, 그 몸값만큼 가치를 당장 만들어 내지는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큰 회사에서 개발 업무의 일부만 분업화된 환경에서 잘하는 것과, 프론트엔드 백엔드 가릴 것 없이, 심지어 기획이든 디자인이든 다 참여하고 서버 운영도 돌봐야 하는 상황은 분명 도전이고 재적응할 기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젊고 예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새침만 떨고 뭘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 “환상을 깨셔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이 큰 회사에 다니는 개발자인데, 주변에서 개발자 소개를 요청받는다면, 어지간하면 그냥 물러서는 편이 좋습니다. 열심히 알아봐서 소개해줬다고 하더라도 결렬될 확률이 훨씬 높으며, 설사 연결이 됐다고 해도, 이득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시간과 정력 낭비할 생각 말고, 그저 스팸 메일을 지우듯, 광고 전화를 끊어버리듯, 가볍고 무례하지 않게 상황을 재빨리 끝내시면 됩니다.
반대로, 당신이 스타트업 (코)파운더이고, 구인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감히 이런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냥 포기하세요. 시니어 개발자 구인의 방법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런 사람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이미, 개발 능력자를 구할 수 있는 누군가라면, 이미 그런 사람이 주변에 모여있는 게 맞습니다. 괜히 구하기도 어려운 사람, 그리고 구해도 위험 부담이 큰 사람 찾느라 애쓰지 마시고, 이미 있는 개발자를 최대한 지원하고, 함께 성장할 환경을 만들어주며 나아가는 것이 현명합니다. 함께 일하는 지금의 주니어 개발자가 그토록 바라던 시니어 개발자가 되는 것이지요.
불굴의 스타트업 정신으로
앞에 드린 차갑고 건방진 조언이 현실적입니다만, 희박하나마, 그런 환상의 시니어 개발자를 서로에게 좋은 조건으로 채용하고, 서로 동기부여 충만해서 아름다운 창업을 이뤄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아직 스타트업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제 말이나 조언이 틀리다는 판단으로 도전 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대기업에 다니는 시니어 개발자를 구하기 힘들 것이라는 일반적 얘기이지, “개발 능력자”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몇몇 안되는 이유와 흔한 환상을 깨드린 것이 이 글의 전부이고, 이제 해결할 방법은 여러분의 몫일 것입니다. 불굴의 스타트업 정신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게하는 힘으로 하시는 일 잘 이뤄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혹시 좋은 방법으로 이뤄내셨으면 제게도 좀 알려주세요. 저도 조만간 그런 입장으로 들어설지도 모르겠네요. 😉
그리고 결국 다 알게 되듯이
위에 웃자고 비유한, 남녀의 외모나 경제적 조건 등의 스펙(?)들은 사실 정작 연애를 하거나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데에 (조금은 관련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항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타트업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 시니어 개발자의 스펙이나 조건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요?
– 끝 –
덧) 조만간 여력이 된다면, 이 글과는 정 반대되는 요지로, 대기업에 다니는 개발자인 당신이 왜 회사를 떠나야하는지를 주장하는 글도 써보려고 합니다.
이상의 글은, 반나절 신나게 휘갈겨 써서 Publish 했다가, 소심한 걱정이 들어서 Unlisted로 내렸었습니다. 혹시나 저에게 개발자 소개를 부탁했던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맘 상해하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잠깐 퍼블리시된 사이에도 입소문(?)이 퍼져나갔는지 이미 조회 수가 많아졌네요. 이렇게 된 이상, 미리 오해를 풀 설명을 덧붙이며 다시 공개로 전환합니다. 그런 노파심에 덧붙이면, 그동안 저에게 개발자 소개를 진지하게든 지나가면서든 부탁했던 분이 최소 5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글 “투자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중에는 남부러운 Exit를 이뤄낸 멋진 로켓 스타트업 창업자도 두 명이나 있고, 해외 유명 VC에게서 투자받으며 뻗어나가고 있는 스타트업 창업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하에 언급한 극단적인 묘사는 본인에게 해당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심지어, 엊그제 만난 대학생 스타트업 팀이 저를 그 시니어 개발자로 여기고, 시니어 개발자 구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을 정도로 아주 흔한 일입니다. 대견한 학생팀의 열정이 부러웠을 따름이지요.